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약진 운동 (문단 편집) === 농업집단화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나서 [[마오쩌둥]]은 전국민의 0.1~0.3%를 제거하는 가혹한 숙청을 통해 전국을 장악하고 자신이 원하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1949~1953년에 5억 5천만 중국 인구 중 화중과 화남에서 죽은 [[중국인]]만 [[마오쩌둥]]이 인정한 수치도 71만에 따르고, [[중국 공산당]] 내부에선 200만명 설까지도 나왔다. 여기에 화북, 만주를 합치면 최대 400만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별문서가 있는 [[대숙청]] 때 희생자가 최대 150만 명이니 중공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 수 있다. 부농과 중농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 수익을 올리는 것 자체에 대한 적개심, 농민들의 전통적인 부수입인 여러 가내수공업들이 [[중국 공산당]]의 손에 철저히 파괴되었다. 참고로 윌리엄 스키너가 Late Imperial China 저널에 제시한 후기 [[청나라]]의 경제 구조는, 이미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해안방어하겠다고 깨뜨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중공이 전통적 중국 농업 경제구조를 무시했다는 말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청대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둥베이]] 지방은 지주세력인 리안챤(糧殘)이 미방(정미소)과 유방(착유소, 공업화 이전 [[둥베이]] 지방의 경제력의 축은 대두에서 나오는 기름이었다. [[산미증산계획]] 때 [[일본]]이 [[한국]]의 [[쌀]]을 약탈하고 대신 준 것이 [[만주]]에서 나오는 [[잡곡]]과 탈지대두, 즉 콩[[깻묵]]이었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주를 축출하면서 동시에 경제적 순환구조가 무너졌다. 그 결과, 이미 공산당이 장악한 첫 몇 년 동안 [[중국]] 전체의 생산량은 국민당 시절보다 30% 이상 감소한 상태였다. [[마오쩌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련]]식 집단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인민공사, 영어로는 commune(코뮌)을 설립해서 [[협동농장]]으로 개편했다. 소련의 예에서 보듯이 이는 농업생산량을 극도로 떨어뜨리는 조치였다. 이를 위해 인구 이동을 법적으로 금했고, 자택에 재산을 쌓아두거나 음식을 저장하는 것은 반동분자의 행위로 몰아 강력하게 처벌했다. 기존 식당과 객잔은 물론이고 사원, 도관 같은 곳도 모두 폐쇄시켜버린 다음 공용급식소로 개편했고, 일반 가정집들도 공산당원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곡식과 소금, 조미료, 솥과 그릇, 심지어 수저까지 모두 수거해갔다. 모든 인민들은 일체의 개인 취사를 금지당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엄한 벌을 받았다. 식사는 오직 공용급식소에서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한 이유는 "농민이든 공장에 다니는 공민이든 간에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과, "개인 취사를 하면 잉여 식량을 비축하게 되고, 이는 곧 계급이 된다"고 보는 [[공산주의]] 원칙 때문이었다. 공영급식소 제도는 남한에서는 생소하지만 당시 공산권 국가에서는 널리 통용된 개념이었다. 즉, [[구내식당]]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규모로 체계를 갖추어 운영한 것으로, 단순히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도입된 것이 아니라 공산국가에서는 전 인민은 각자 정해진 노동을 수행할 때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발전할 수 있었다고 믿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노동에 집중하기 위한 기반 시설 확충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공산권 국가들은 소련을 중심으로 육아를 도와주는 공공탁아소나 임신 및 출산 여성을 위한 육아휴직, 세탁물을 세탁하고 배달해주는 서비스까지 도입되었으며 이는 같은 시대의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선진적인 것이었다. 공영급식소 역시 이 일환으로 생긴 것인데, 부부라고 해도 각자의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기본적인 사회에서 취사를 개인 가구에게만 맡겨버리면 여자에게 가해지는 노동 부담이 더 커지게 되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다. 실제로 공산권 국가는 남녀평등을 동시대의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일찍 달성했다. 물론 소련 붕괴의 혼란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이러한 사회적인 이유를 빼더라도 도시락을 매일같이 따로 챙겨가서 먹는 것은 귀찮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개별적으로 밥을 사먹는 것은 금전적인 지출을 해야하기 때문에 직장인들에게 공용급식소에서 밥을 먹게한 것이 맛은 둘째치더라도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많은 도움이 되기는 했다. 이외에도 당시 도시 지역에서는 가정용 아파트가 아닌 부엌과 거실을 공유하는 단칸방에서 주거하는 경우가 많아서 개별취사가 어렵기도 했고, 국가의 요구가 결합된 점도 있다. 소련에서 가정용 아파트는 195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도시민은 공용 아파트인 코무날카에서 사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전쟁 와중에 많은 주거지가 파괴되어 [[천막]]이나 [[지하실]], 바라크 같은 막사형 주거 시설에서 사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공영급식소 제도는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었고, 많은 호평을 받았다. 소련에서 직장인들이 공영급식소에서 식사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폴란드]]처럼 바르 믈레츠니(Bar Mleczny)처럼 공용 급식소가 아예 주된 외식장소가 된 경우도 있었다. 믈레츠니는 공산 [[폴란드]] 시절 전국에 설치된 일종의 공공식당으로 공산정권 붕괴 이후에도 존속하고 있어, 돈 없고 시간 없는 서민들과 외국인 배낭여행자들의 좋은 외식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각 바르 믈레츠니는 다른 이름의 간판을 걸고 장사하고 있는데, 2017년 바르샤바 기준 간단한 2코스 런치를 저렴한 가격인 7-10즈워티(한화 2-3천 원가량)로 해결할 수 있다. 다만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 곳이 많다. 또한 의외지만 [[북한]]도 공영급식소를 운영했고, 식량난으로 국가 전체를 말아먹기 전까지는 제대로 운영했다. 북한은 밥공장이라 하여 양권(배급권)을 가지고 밥공장에 가면 정해진 분량만큼의 밥을 제공했다. 보통 퇴근길의 여성이 밥공장에서 밥을 타다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먹는 모습이었고, 반찬은 각 가정별로 알아서 해먹었다고 한다. 즉, 밥만 따로 테이크 아웃을 하는 셈이다. 다만 반찬 공장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간단한 염장 생선(주로 명태) 따위를 양권에 따라 지급하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주로 평양이나 김책과 같은 큰 도시). 다만 이 '제대로'는 어디까지나 일부나 양적으로다. 가령 북한이 가장 잘 나갔던 70년대에는 양적으로는 모자람 없이 배급되었고 심지어 너무 많이 배급받아 '''버리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힘들 일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풍요를 의미하지 않았다. 여기서 '버렸다'고 하는 것은 명태인데 명태가 가장 구하기 쉬운 만큼 그나마 제일 풍족하게 배급해줄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넉넉하게 나눠줄 수 있던 것이었다. 이처럼 다른 공산 국가에서는 공영 급식소를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개량하여 사람들의 생활에 편의를 주고, 사회 전체의 효율성 향상을 위해 도입했다면, 중국은 제도 그 자체에만 몰입하여 너무 무계획적으로 시행해버렸다. 그 어떤 나라도 공영 급식소를 운영하면서 개인 취사를 금지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중국은 개인 취사 자체를 금지해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공산권 국가들 중 최강 대국인 소련마저도 삼시 세끼를 무조건 급식소에서 먹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는데, 소련의 급식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강요만 하고 정작 중요한 제도 구축이나 인프라 확충이 되지 않은 채 무리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니, 엉망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소련의 기혼 여성들은 공영 급식소를 신뢰하긴 했지만, 가족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주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해 되도록이면 가정에서 가족과 식사를 하려 했으며 오븐과 가스 레인지를 비롯한 조리 기구에 관심이 많았다. 소련 수뇌부는 이런 여성들을 위해서 각종 조리 기구와 가전 제품의 증산과 품질 향상, 식자재 제공을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열량 섭취량 측면에서 소련은 브레즈네프 정권 말기까지 미국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열량을 인민에게 제공했다. 육류 같은 경우에는 그야말로 정권 차원에서 신경 쓰던 것으로서 50년대 후반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인민의 눈치를 봐서 육류의 소매 가격을 인상하지 않으면서 축산 농가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도매 가격은 높여줘서 육류 공급 및 구매 비용이 국가 예산에 어느 정도 부담이 될 정도였다. 58년에 미국이 체제 우위를 선전하고 소련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박탈감과 소련 정부에 대한 불만을 느끼게 만들려고 모스크바에서 엑스포를 개최하고 가전 제품 전시회를 열었을 때는 꽤나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공산주의 사상 자체가 남녀평등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고, 전통의 베갯머리송사(...)도 있지만 서구권과 마찬가지로 소련도 산업화와 세계대전 당시 공장과 전선에 나간 남자들 대신해서 가정과 생산, 운영을 도맡았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여군부대를 대량으로 운용하여 많은 피를 흘렸고 전후 남자들이 2천만 명 가까이 죽으며 극심한 여초사회까지 되었기에 여성들에 대한 눈치보기는 서구권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할수는 없었다.] 공용급식소의 운영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첫째, 모든 인민들은 자신의 노동에 의한 대가로 밥을 먹는 것이라 음식이 전면 무상이었는데,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양을 먹든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둘째로 인원 관리 또한 허술했는데, 공용 급식소만 돌아다니며 몇 끼씩 식사를 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셋째, 공용급식소의 관리인과 공산당원도 자신의 음식과 식재료를 쓰는 게 아니라서 열정적으로 이런 문제점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넷째로 작게는 마을 1개, 크게는 도시 하나의 인구가 모두 집단 식사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오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 "천 가구가 사는 부락에서 한꺼번에 밥을 지어 먹으려면 솥과 부뚜막이 천 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뚜막 천 개가 한 번에 들어갈 곳이 없으니 결국 판소(급식소)를 가호로 나눠야만 했다. 이것이 개인 취사와 다른 게 무언가?" >『易歷求林地區燒給䛩言』, 2003, 吳正龍 물론 처음에는 제법 괜찮은 식사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메뉴가 조악한 죽과 빵 등으로 통일되었다. 인간을 노동하는 기계, 식사를 기계에 넣는 연료로만 생각하고 마치 공장을 배치하듯 앞뒤 없는 계획을 짠 탓에 결국 수억 명이 넘는 백성들의 삶의 질이 완전히 망가지게 된 것이었다. 넓은 중국 대륙에서 각 지역의 경제적 형편이나 환경의 차이, 사회문화적 특징, 기반 시설과 제도의 차이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결과, 이 정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국가의 시스템이 완전히 역변했기 때문에 완전히 농업 생산량에 맞춰 인구를 재배치하고, 잉여 농산물을 저축, 보관해서 미래를 대비하는 것도 불가능해져, 결과적으로는 재앙을 계속해서 키워버리는 꼴이 되었다. 이후 공용급식소가 완전히 망해버리자, 어쩔 수 없이 [[중국 공산당]]도 공동 식사가 '당군 관계의 악성 종양'이 되었다고 인정하면서 예전처럼 개인 취식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초토화된 개인 가정의 식재료는 둘째치더라도, 정부가 거둬간 솥과 식기 도구도 돌려받지 못해서 밥을 지어먹으려면 당장 솥부터 구해야 할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묘사는 위화의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오늘 거리를 걷다가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집집마다 들락날락하며 솥과 밥그릇, 쌀, 간장, 식초, 소금까지 가져가는 걸 봤다구. 이틀이나 갈까 싶었는데, 우리 집에도 와서 싹 가져가버렸어.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앞으로는 어느 집이든 밥을 할 수 없다는 거야. 전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야 한다더군. 우선 우리 생사 공장에 하나, 천령사에 하나. 그 [[절(불교)|절간]]이 식당으로 바뀌었다구. [[승려|중]]들이 전부 머리에 흰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주방장이 됐어. 또 하나 우리 집 앞에 있는 극장도 식당으로 바뀌었지. 극장 식당에서는 어디서 밥을 하는지 알아? 바로 무대에서 한다구. 월극에서 처녀 총각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전부 채소를 씻고 쌀을 일고 한다더군." >----- >"생각 좀 해보라구. 솥하고 밥그릇, 쌀, 소금, 간장, 기름, 식초까지 가져간 데다 부뚜막까지 부숴버렸으니. 당연히 대식당이 평생 먹여줄 줄 알았지. 1년도 못 갈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느냐구. 1년 만에 다시 알아서 밥을 해 먹으라니. 부뚜막 고치는 데도 돈이 들고 솥이랑 밥그릇, 심지어 접시랑 국자도 다시 사야 하는 데다, 쌀, 소금, 간장, 기름, 식초까지 사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다만 공용급식소 자체는 주먹구구식으로 설립된 만큼 각 일률적인 형태로 운영된 것아 아니라 각 지역별로 따로 국밥식으로 운영되었고, 그래서 한 지역 내에서도 계속해서 공용급식소가 운영된 곳이나 운영이 중단된 곳이 공존했다. 차라리 공공식딩이라도 정성들여 운영했으면 굶어죽을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공공식당이 지속적으로 운영된 곳은 식단이 부실할지 언정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았는데 공공식당마저 폐쇄된 곳은 그야말로 지옥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인구 이동을 제한하는 제도는 느슨해졌을지언정 21세기가 된 이후로도 시행되고 있는데, [[이촌향도]] 현상을 통제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며, 잘사는 지역에 예산을 무한정 늘릴 수 없으니 일정수준에서 통제하겠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겸했다. 호구제(戶口制)라고 하며, 자기가 소속된 호구를 벗어나 다른 지역에 가서 일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농민공]]. 물론 2010년대 이후로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구인난이 일어나면서 농민공들도 일할 수 있다면 일하는 마인드와 거리가 멀어졌고, 중국의 인구증가세가 꺾임에 따라 도시간 인구쟁탈전이 심해져서 이 정도로 심하게 불이익을 주지는 않지만 어차피 대도시 지역의 부동산이 너무 비싸서 강제가 아닐뿐 여전히 정착하기 힘든건 매한가지라는 평이기는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